My Scrapbook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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궤적My Scrapbook 2014. 8. 15. 08:22
나와 다른 한 명이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. 거대한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. 조금도 꾸미지 않고 천천히 분리되며. 그래 구름이. 멀리에도 구름이 있었다. 두 명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구름을 보았다. 구름들은 천천히, 그리고 천천히.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속도. 저쪽으로. 그냥 저쪽으로 미끄러졌다. 두 명은 각각 무슨 말을 했는데 중요한 건 아니었다. 어쩌면 구름은. 그냥 보이는 것이고. 그저 나는 풀썩, 구름 위에 앉고 싶어 하는 어떤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. 그러니까 자꾸 풀썩, 풀썩, 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밤이 왔다. 나와 다른 한 명은 더 이상 나무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. 구름은 조금만 보였다. 나는 그것도 좋았다. 다른 한 사람은 어땠는지, 지금은 알 수 없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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곤핍困乏My Scrapbook 2014. 5. 27. 21:26
열어둔 창밖 그 눈높이로 게으른 구름 한 폭 벌써 몇 시간 째 허공을 베고 누웠다 좀더 자자 좀더 졸자* 나도 베개를 고르고 다시 머리를 파묻는데 슬며시 감기는 시야 속 하필 혼신을 다한 새 한 마리 한 점 까마득하게 하늘을 뚫고 있다 *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. 네가 어느 때에 잠 깨어 일어나겠느냐.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하면,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, 네 곤핍困乏이 군사같이 이르리라.(잠언 6장 9~10절) - 김명인 [곤핍困乏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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물에게 길을 묻다 3 - 사람들My Scrapbook 2014. 4. 8. 15:59
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*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하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로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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돌아와 보는 밤My Scrapbook 2014. 2. 18. 07:09
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.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. 그것은 낮의 연장(延長)이옵기에――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.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, 이제 사상(思想)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. - 윤동주 [돌아와 보는 밤]